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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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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11주기
“기억·약속·책임”

진실·책임이 이끄는 변화
기억·약속이 만드는 내일

안산이 품고 대한민국이 기억하며 세계가 찾는
4.16생명안전공원

2024년 10월, 모두가 기다리던
4.16생명안전공원이 첫 발을 내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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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잘 있니?”

그날,
우리 아이들과 했던 약속을
엄마 아빠는 기억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함께하는 이유 입니다

“세월호 이후는
달라져야 합니다"

반복되는 참사를 멈추게 하는 길은,
처벌되지 않는 책임의 역사를 청산하는 것 입니다

알립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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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생일

  • 4233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1반 김영경 학생의 생일입니다. "영경아 나비가 되어 어머니께 날아 온 너하늘 하늘 날아라팔랑 팔랑 날아라언젠가 나에게도 들러 안부 좀 전해줘.나비가 문득 나에게 오면 너 인줄 알게" "양갱" "엉겅퀴" 김연경,영경이는 위로 오빠가 둘이 있는 삼남매중에 막내이며 웃으면보조개가 예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딸이었습니다. 수학여행을 가기전에 용돈이 부족하지 않느냐고 묻자 집 앞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쓰면 된다고 괞찮다고.걱정하지 마시라고 할정도로 영경이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은 스스로 마련 했답니다. 평소에도 용돈 한 번 달라고 한적이 없을 만큼 힘들게 돈 버시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도왔습니다.또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잘하는 착한 딸이자 손녀였습니다. 영경이의 꿈은 어릴적에는 헤어디자이너를, 또 한때에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희망하기도 했지만 아빠의 몸에 난 수술 자국을 본 후로는 아픈이들을 치료해주는 간호사가 되고자 했습니다.다른 사람의 외모를 가꾸어 주는 것도 좋지만 아픈 사람과 함께 하는것도의미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또한 영경이는 학교에서는 볼링부에서 활동했습니다.영경이의 짝꿍은 우소영이며 사춘기 소녀처럼 故남윤철 선생님을 짝사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착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예쁜 연경이는 참사 다음날인4월 17일에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만  그 과정에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처음 발견 되었을 때에는 김영경으로, 목포에서는 같은반 김민지로 안산까지, 안산에서 민지 부모님의 확인을 거쳐 다시 영경이로 목포로 이송되어그제서야 부모님과 함께 안산으로 돌아왔습니다.사고초기부터 허둥지둥 우왕좌왕하는 무능한 정부의 한심한 민낯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우여곡절끝에 돌아온 영경이는 안산 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가끔 네 꿈을 꾼다.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더니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첸다....."    
    4.16가족협의회 11-17
  • 4233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7일 월요일 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4반 김웅기 학생의 생일입니다. "사랑합니다_여러분모두를....." 김웅기 제준이냐시오, "안녕 아들.너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너무 미안해서 다른 할말이 없어엄마가 할 수 있는게 없네.할 수 있는 만큼 하는데까지 해볼게.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웅기는 9살. 7살 많은 형이 둘 있는 삼형제 중에서 늦둥이 막내입니다.어머니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태어난 늦둥이 막내라서 정말 감사했고,선물 같았던 아이라고 하셨답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친구들과 있을 때는 밝고 명랑하고 때로는 수다스러웠습니다.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특히 큰형을 어려워했지만 형들을 부모님처럼 잘 따르고 좋아했다고 합니다. 부모님께나 형들에게 "싫어요" "아니요" 하는 법 없이 잘 따랐지만 자기주관도 뚜렸해서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줄 아는 웅기였습니다..휴대폰으로 무한도전을 즐겨봤고 유재석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웅기의 마지막말은카카오톡 단체방에 남긴"사랑합니다. 모든분들을..."이었습니다.이후 웅기는 수학여행 하루전날 아버지가 사 준 줄무늬 남색남방에 주황색 구명조끼를 입고4월 29일에야 부모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웅기 이야기는 KBS도전골든벨에 동갑내기 조카 한모양이 출연하여웅기 "애기삼촌"의 이야기를 들려줬던 부분을 편집하여방송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세월호 사고 시 오보를 양산하며 거짓 기사를 올렸던 언론의 한심한 작태를 다시금 볼 수 있었습니다, 웅기 아버지는 웅기 영정을 가슴에 품고 십자가를 메고 진도에서 광화문까지 도보행진을 하였으며,어머니께서는 국회와 청운동, 팽목에서 웅기와 친구들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웅기와 나이는 같고 생일도 빠르지만 서열상 조카인 한모양이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모아봅니다. "정말 기억하지 않고 싶다고 해서 모른척하고 내 일이 아니라고해서 못 본척 하는 비겁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피지도 못하고 진 우리 삼촌 모두가 잊어도 내가 기억할게. 애기 삼촌,이 세상 모두가 삼촌을 잊어도 우리는 삼촌의 억울함을 절대 잊지 않을게, 사랑해"  
    4.16가족협의회 11-17
  • 4230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   오늘은 단원고 6반 담임 선생님이셨던 남윤철 선생님의 생일입니다. 남윤철 선생님과 이근형학생은 교내 보컬부 지도 교사와 학생으로 사제지간이기도 합니다.   남윤철 선생님,.선생님은 아마도 세월호가 이상하다는 것을 최초로 느낀 사람들 중에 한 분입니다.배가 이상하다고 느낀 선생님은 같은반 제자인 최덕하에게 최초로 119에 신고하도록 하였고 제자들을 구하러 찾아다니셨습니다. 119에서 덕하의 말에 못 믿어하자 선생님이전화를 바꿔 설명 후에 다시 제자들을 구하러 뛰어 다니셨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갑판위로 끌어올리고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는 선실로 다시 왕래하기를 세 번.그리고 네 번째 선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목격 된 10시쯤."물이 허리쯤까지 차오르는 상황에서도 우리들을 챙기고 있는 선생님을 봤다. 물이 어깨까지 차오르고 허겁지겁 나와 돌아보니 선생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제자의 설명이었습니다.선생님은 17일 객실 후미 쪽 바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이 같은 헌신적인 희생으로 6반은 1반 19명 다음으로 많은 13명이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누군가를 안고 있었던 듯 양팔을 앞으로 내민 채였습니다.   남학생들에게는 형 같고 여학생들에게는 오빠 같고. 그를 보려고 일부러 학생들이 교무실을 들락거리게 만들었던 선생님이셨습니다.   남윤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는 목소리 좋고 잘생기셔서 "꿀성대남쌤"으로 불리었습니다.제자들에게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주셨고 야구 모자를 즐겨 쓰시며 마주친 학생들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주시곤 하셨답니다. 선생님의 제자 사랑은 교무실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선생님 의자 곁에는 상담 의자가 하나 더 놓여있으며제자들의 고민 상담을 친구처럼 편하게 들어주곤 하셨습니다.국민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단원고에 부임 후영어 선생님으로 재직하셨으며 교내 보컬부 지도 교사로도 활동하셨습니다. 대학시절 "사람 좋고 쾌활하며 워낙 잘생기고 사교성이 좋아선생님이 나타나면 강의실 복도가 시끌벅적했다" 는 선생님,배움의 끈을 놓지 않은 선생님은 사고 당시에도"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한국언어문화학과"에 재학중이셨습니다. 살아 생전 제자 사랑의 실천과 교사로서의 사명감으로최선을 다한 선생님의 사랑을 기리고자 모교인 국민대는 북악관 708호 강의실을 "남윤철 강의실"로 명명하여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으며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역시 "남윤철 장학생"을 매년 선발하여 선생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사고 이틀째인 17일에 사고 해역에서 떠올라지금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천주교 묘역에 잠들어 계십니다.선생님의 제자 사랑을 요약한 한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나는 교사로서너희와 더불어 살고너희와 더불어 죽노라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너희와 더불어 살아왔듯이너희와 더불어 죽으리라 죽음의 문턱에서너희 한 사람 남았다면난 기꺼이 돌아 가리라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어둠에 두지 않으리라죽음에 두지 않으리라   더 살리지 못해서너희와 나누지 못해서먼저가니 미안하구나.    
    4.16가족협의회 11-14
  •  4230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4일 금요일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7반 이근형 학생의 생일입니다. 남윤철 선생님과 이근형 학생은 교내 보컬부 지도교사와 학생으로 사제지간이기도 합니다. "사랑합돠"4월 16일 오전 9시 30분 근형이는 엄마에게 이렇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습니다.이상하게 생각한 엄마는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근형이는"배가 충돌 한 것 같다. 배가 가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오전 9시 42분 근형이는 "살아서 갈거예요, 기다려요 "라는 마지막 문자를 엄마에게 남겼습니다.그러나 그날 근형이는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근헝이에게는 두살 많은 형과 다섯살 남동생이 있었으며근형이는 늦둥이 남동생을 그렇게도 아꼈다고 합니다.엄마, 아빠에게도 애교 많고 씩씩한 딸 같은 둘째아들 이었습니다.맞교대로 24시간 일한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젼을 보고 있으면 아빠를 깔아 뭉개며 장난치기를 좋아 했습니다. 근형이는 사고 후 23일이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에 부모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근형이의 지갑에는 3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한 달 용돈이 5만원인 아빠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들에게 쥐어 준 돈 이였습니다.아버님은 이 돈을 보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지상하고 배려심 많은 근형이는 언제나 엄마와 동생이 자신보다 먼저였던 가족의 보호자였습니다.학교에서도 유명했던 "동생바보" 근형이,다섯살 난 동생의 똥 기저귀를 갈아주고,맘마 먹여주고, 안아주고, 업어주고, 뒹굴며 놀아주고....학교에서는 같은반 수빈이와 함께 보컬부에서 활동했습니다. 근형이의 꿈은과학선생님이 되는 것 이었습니다.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는 노력파였던 근형이는 성적도 우수하였습니다.그러나 근형이를 태웠던 세월호는 근형이의 꿈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근형이는 짝꿍 이민우와 함께 1분단 맨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지금은 경기도 평택서호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어쩌면 너 없이 자랄 동생 걱정을 했을 것 같은동생바보 근형아.정말 사무치도록 그립구나.보고 싶고 만지고도 싶은데어디로 가야 널 한번이라도안아볼수 있을까내 아들로 살아줘서 고맙고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했어.사랑한다.내 소중하고 특별한 아들아." 세월호가 바닷속에 잠긴후 23일간 진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없이 울었던 부모님,지난해 분향소에서 뵌 아버지는 소중한 보물이자희망을 잃어버리셨다며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4.16가족협의회 11-14
  • 4229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3일 목요일   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1반 이연화 학생의 생일입니다.   "나 두고 먼저 가는게 어디있냐 !너가 하고 싶었던거, 아직 할 게 너무나 많은데 두고가면 어떻게...이럴 줄 알았다면 미루지 말고 다할걸.너무 미안해, 너만 기다리고 있었는데..거기서는 안 무섭고, 안추워?거기서는 평생 행복했음 좋겠어.항상 밤마다 네가 너무 생각나서 울다 자. ."   이쁘니 여니,연화는활달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였습니다.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손톱을 예쁘게 정리해주거나 꾸며주는 것을 좋아라 했습니다.학교에서는 댄스 동아리활동도 했구요.   연화의 꿈은나중에 커서 네일 아트를 하고 싶었던 아이였습니다.연화는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예뻤던 아이 이기도 했답니다.오빠 하나를 둔 연화는 사촌 언니와도 친하게 지냈습니다.사촌 언니가 부탁을 하면 툴툴대면서도 잘들어 줬다고 합니다.임신을 한 사촌언니가 떡꼬치가 먹고 싶다고 하자 온 동네를 다 뒤져서 사다 준 연화였습니다.초콜릿을 좋아하고 먹고 싶어 했지만 알레르기 때문에 먹지 못했던 연화이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밝은 성격답게 친구들이 많았습니다.연예인 소지섭을 좋아해 늘 자신을 소지섭 부인이라고 했던 연화였으며,친구들의 고민상담사였던 흔적이 책상 위 수북한 메모에서 발견됩니다.4반 숑키승묵이 어머니의 메모도 발견되었는데요.실은 강승묵은 연화의 좋은 남자친구였으며. 승묵이에게는 엄마에게 말하지 않은 여자친구였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아침,연화는 친구들과 SNS로 수다를 떨었습니다.사촌언니는 연화에게 제주도 감귤 초콜릿을 사오라고 부탁했습니다.하지만 연화는 초콜릿을 사오지 못했습니다.사고 일주일만에 이연화가 아닌 111번으로 ,출산후 26일만에 신생아를 안고 연화를 찾아나선 가족의 품에 4월 22일에야 돌아온 연화는지금 경기도 화성효원추모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4.16가족협의회 11-14
  • 4229번째 4월 16일 2025년 11월 13일 목요일 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4반 김범수 학생의 생일입니다. "가족들은 보고 싶어서 매일 꿈속에서라도 기다리고 있단다.편지를 써보고 책상에 앉아 과거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엄마는 애써 아픔과 고난을 극복하려고 몹시 애쓰고 아빠는 한 점 누 가 될까 해서 할수 있는한 여러 방면으로 유가족들과 함께하고...." 범수의 꿈은 국군장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186cm. 85kg. 신발사이즈 310밀리미터. 체격이 좋고 힘이 장사였던 범수였습니다.운동을 좋아해서 초등학교때 태권도 2품을 따기도 했고 장교가 되려면 공부도 잘해야 한다며매일 밤 10시 넘어서까지 학교 야간자율학습과 학원에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범수의 책상에는목표로 "공부하기"라고 씌여져 있습니다.자신의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리던 범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덩치는 컷지만 범수는 손재주가 많아서 종이접기와 음식 만들기를 잘했습니다.단원고 제과제빵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만든 과자와 빵을 항상 엄마에게 먹으라고 가져다 줬던 착한 아들이기도 했습니다.그러면서도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게임도 잘하고 만화책도 즐겨 봤다고 합니다. 범수는 늘 집에 오면 "엄마. 나 옴" 하고 인사를 했으며 엄마는 범수를 "범" 이라고 불렀습니다.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에도 아빠에게 긴급한 상황에도 차분하게 전화로 알리며"꼭 살아서 가겠다"고 했던 범수였습니다.아버지도 구명조끼 확인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안내방송 잘 듣고 대처하라고 하였지만결국 9시 17분에 전화는 끊기고 말았습니다. 자라면서 성실하고 말도 잘 들었던 범수였고 힘이 장사였고 운동을 잘했던범수였기에 꼭 살아서 돌아 올 거라 여겼지만범수는 끝내 차가운 몸으로 가족의 품에 돌아오고 말았습니다.범수아버님은 다리가 불편하신 몸으로 범수와 친구들을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절룩이는 발걸음으로 키 만큼 큰 남천화분을 안고 3층 계단을 오르시고수술 후에는 도보행진을 떠난 가족들을 대신해 혼자서가족대기실을 지키시는 등 누구보다도 진한 부정을 보셨지요.모든게 사랑하는 범수와 친구들을 위한 일이라 하시며.... 범수는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목록수정삭제답변글쓰기
    4.16가족협의회 11-14
  • 4225번째 4월 16일 2024년 11월 9일 토요일오늘은 단원고 명예 3학년 5반 김한별 학생의 생일입니다. "한별아 나의 아가한별아 나의 아가엄마는 이렇게 너의 이름을 오랫동안 부르고 있다.한별아 나의 아가한별아 나의 아가"한별이는 3.2kg으로 태어 났습니다.한별이는 위로 형이있는 형제중에 막내입니다.엄마가 바쁘게 일하러 나가고 할머니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형은 엄마를 찾곤 하였지만 일찍 철이든 한별이는 늘 담담하게 받아들이곤 했답니다.한별이의 중학교때의 꿈은 프로게이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아끼는 물건을 친구에게 양보하고, 엄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한~별~아~하고길게 부르면 엄마에게 다가와 어깨도 주물러 주고 팔 다리도 주물러주면 엄마는 도곤도곤 하루의 피로를 풀곤하는 착하고 효심 많은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단원고에 진학하며 체중도 줄이고 공부도하여 대학에 진학하겠다고 목표를 세웠던 한별이었습니다..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 한별이의 목표입니다.한별이는 노래를 잘해서 친구들이랑 노래방에 가는 걸 좋아했다고 합니다.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답게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아했습니다.또한 친구들이 놀리거나 화를 내도 한별이는 같이 흥분하는 일 없이 언제나 한결같은 너그러운 아이였다고 합니다.수학여행을 떠나기전,주일이면 엄마와 함께 다니던 교회에 갔던 한별이는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서 밥도 먹고, 구석구석 교회 살림살이도 들여다보고는 목사님께 "그동안 돌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했답니다.목사님은 뭔가 이상했지만 철이 드는구나 생각하고 잘 커 줘서 고맙다고 답하셨습니다.하지만이게 한별이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한별아,너희 교실, 너의 자리에문득 발걸음이 멈춰졌어.이것도 인연이겠지?너희의 땀냄새도 하나 없는 교실에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어누구를 위한 걸까?그래 너는 이름처럼 큰 별이 되었을 거야.별나라에서 나 만나면 모른채 하기 없기!!그러면 너 듁음 ㅋㅋㅋ""한별아 안녕,나는 너를 직접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해 분향소에서 네 얼굴을 한참동안 본적이 있다.오늘 교실을 둘러보다가 네 얼굴과 이름이 눈에 띄어 앉았다.너희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정치인중에 한 명이라 죄스러운 마음이다.너희들의 밝은 미소와 최후의 순간에도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잠시후에는 나갈 수 있겠지 하는 부모 선생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산산히 부셔졌지.그때의 동영상을 잊을 수 없다.진상규명과 함께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마."한별이는 4월 20일에 가족의 품에 돌아와 안산하늘공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4.16가족협의회 11-09
아이들 생일더보기
아이들이 곁에 없는 4월 16일은 매년 돌아옵니다.

봄날, 길가에 피어나는 꽃만 보아도 마음이 시립니다.
아이를 보고싶고 만지고싶어 꿈에라도 찾아와주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엄마 아빠이기에 그날 희생의 무게만큼
책임자가 책임지게하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별이 되버린 아이들이 꿈꾸던 삶을 함께 기억해주세요.

관계기관

안전한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곳


  •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 안산사무실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중앙대로 685(초지동 666-2) 산업지원본부(옆) (우)15396
  • 서울사무실서울특별시 종로구 대학로 45 임호빌딩 6층 (우)03127
  • 사업자등록번호 727-82-00042
  • 대표 김종기
  • 대표전화 031) 482-0416 (월~금: 오전 9시~오후 5시)
  • 팩스 031) 413-5380
  • 이메일 416family.org@gmail.com
  • ※ 세월호 팽목기억관 주소 (우)58945 전남 진도군 임회면 진도항길 101 팽목마을 ‘(가)세월호팽목기억관’
  • ※ 목포신항 주소 (우)58762 전남 목포시 신항로 294번길 45 세월호 목포신항만거치소
  • ※ 2014-0416 세월호 제주기억관 주소 (우)63313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명림로 300-2
  • ‘(사)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2014-0416 세월호 제주기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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